
약배전 로스팅은 단순히 원두 색을 밝게 만드는 것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이번에는 고온 예열 후 낮은 열량으로 발현을 길게 가져가는 약배전 로스팅 방식을 여러 원두에 적용해봤는데, 결과적으로 언더 로스팅과 강한 산미, 곡물향 같은 문제를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반면 내추럴 원두에서는 가능성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로스팅의 목적은 최대한 밝은 배전도를 유지하면서도 생두 특유의 덜 익은 맛은 줄이고, 향과 산미를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말로는 간단하지만 실제로 해보면 쉽지 않습니다.
조금만 발현이 부족하면 언더 뉘앙스가 올라오고, 그렇다고 후반을 너무 끌고 가면 제가 원하는 약배전의 화사함에서 멀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기록은 성공 레시피라기보다 약배전을 시도하면서 어디에서 문제가 생겼고, 다음 로스팅에서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확인한 과정에 가깝습니다.
이번 약배전 로스팅의 기본 방향

제가 이번에 잡은 방향은 비교적 단순했습니다.
고온 예열, 낮은 열량, 긴 발현.
이전에는 장비 기준 5단계 열량을 사용했지만 이번에는 230도 정도로 예열한 뒤 4단계 열량으로 투입했습니다.
워시드 원두는 100g, 내추럴 원두는 120g씩 사용했습니다.
예열 온도를 매번 정확하게 동일한 수치로 다시 맞춘 것은 아닙니다.
직전 로스팅에서 원두를 배출한 뒤 남아 있는 장비 온도를 그대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실험의 정밀도만 놓고 보면 좋지 않은 방법입니다.
직전 배치의 진행 시간이나 배출 온도가 다르면 다음 배치의 초기 조건도 조금씩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제가 사용하는 환경에서 반복적으로 로스팅할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이번 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과부터 보면, 고온 투입 후 4단계 열량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제가 원하는 약배전이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약배전이 어려운 이유를 다시 느꼈습니다

\약배전은 색이 밝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이번에 로스팅한 원두 몇 가지는 겉으로 보기에는 크게 문제없어 보였지만 브루잉해보니 결과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향은 어느 정도 살아 있는데 맛의 중심이 비어 있거나, 산미만 튀거나, 곡물 같은 덜 익은 느낌이 남았습니다.
제가 이번 테스트에서 가장 신경 쓰게 된 부분도 바로 이것입니다.
약하게 볶는 것과 충분히 발현된 약배전은 다르다.
로스팅 색상이 밝더라도 내부 발현이 충분하지 않으면 컵에서는 바로 티가 납니다.
1. 파나마 카르멘 게이샤 로스팅
첫 번째로 사용한 원두는 파나마 카르멘 게이샤였습니다.
게이샤처럼 향의 캐릭터가 중요한 원두일수록 약배전에서 향을 최대한 살리고 싶은 욕심이 생깁니다.
저 역시 이번에는 무겁거나 단단한 맛보다는 향과 산미를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로스팅이 끝난 뒤 브루잉으로 바로 결과를 확인했습니다.
16g, 60-50-40-30-20 레시피로 추출
원두 16g을 사용하고 물은 60-50-40-30-20으로 나눠 부었습니다.
평소보다 산미와 향이 앞쪽에서 많이 나오도록 추출해보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런데 한 모금 마시고 바로 문제가 느껴졌습니다.
산미가 살아 있는 정도가 아니라 지나치게 날카롭게 올라왔고, 그 아래에서 언더 로스팅 특유의 뉘앙스가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제가 기대했던 것은 화사하고 밝은 산미였는데 결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단맛과 질감이 받쳐주지 못한 상태에서 산미만 앞으로 튀어나오는 느낌에 가까웠습니다.
첫 번째 결과는 사실상 실패였습니다.
게이샤에서 느낀 첫 번째 문제
처음에는 추출 레시피를 너무 공격적으로 가져간 것이 원인인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추출을 조정한다고 해도 원두 자체의 발현이 부족하면 한계가 있습니다.
브루잉에서 산미를 억누르거나 농도를 조정할 수는 있어도, 로스팅 단계에서 생긴 언더 뉘앙스를 완전히 없애기는 어렵습니다.
이 배치를 마시면서 다음 로스팅에서는 1차 크랙 이후를 조금 더 확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콜롬비아 모션 스페셜티 워시드
두 번째는 콜롬비아 워시드 원두였습니다.
이번 원두에서는 게이샤보다 문제가 더 확실했습니다.
로스팅 과정에서는 분명히 팝이 시작되는 것을 확인했고, 팝 이후 약 1분 정도가 지난 뒤 배출했습니다.
시간만 놓고 보면 아주 짧게 끝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발현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브루잉 결과는 예상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첫 모금부터 강한 디펙트 느낌과 언더 로스팅 뉘앙스가 그대로 들어왔습니다.
조금 더 마셔보면서 판단할 수준도 아니었습니다.
한입 마시고 그대로 버렸습니다.
팝 후 1분이라는 시간만 믿으면 안 된다는 경험
이 배치에서 가장 크게 느낀 것은 1차 크랙 이후 몇 분이라는 숫자만으로 발현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팝 후 1분을 가져갔다고 해서 모든 원두가 같은 정도로 발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투입 온도, 열량, 생두의 밀도와 수분, 배치량, 장비 특성에 따라 같은 1분도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전체적으로 낮은 열량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팝 이후에도 원두 내부에 필요한 에너지가 충분히 공급되지 못했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색상과 시간만 보면 얼추 맞는 것 같았는데 컵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런 경우가 약배전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 느낍니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는데 마시는 순간 실패가 드러납니다.
3. 에티오피아 시다마 타데 내추럴
세 번째는 에티오피아 시다마 타데 내추럴입니다.
이번 원두는 앞선 두 배치와는 조금 달랐습니다.
로스팅을 마친 다음 날, 즉 로스팅 후 1일차에 바로 마셔봤습니다.
색상부터 확인했는데 발색 자체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물론 색상만 보고 성공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바로 분쇄하고 추출해봤습니다.
700마이크론 정도로 분쇄 후 푸어오버
제가 사용하는 볼드 텅스텐 필터버 기준으로 약 700마이크론 정도에 맞춰 분쇄했습니다.
그라인더마다 입자 분포가 다르기 때문에 이 수치를 다른 장비에 그대로 적용하기보다는 참고 수준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번에는 푸어오버 방식으로 비교적 적극적으로 추출했습니다.
앞선 원두에서 언더 뉘앙스가 강하게 나왔기 때문에 이번에는 조금 더 추출을 끌어내 맛을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결과는 생각보다 괜찮았습니다.
완전히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앞선 두 원두처럼 바로 실패라고 판단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향과 맛의 방향도 어느 정도 맞았습니다.
다만 아주 약간 부족한 느낌은 남아 있었습니다.
하루 더 기다리면 달라질 것 같았습니다
로스팅 후 하루 만에 마신 커피라는 점도 고려했습니다.
특히 약배전 원두는 로스팅 직후보다 며칠 지난 뒤 향과 맛이 조금 더 안정적으로 느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원두는 바로 실패라고 판단하지 않고 2~3일 정도 더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제가 느낀 부족함이 단순히 로스팅 발현 문제인지, 아직 가스가 충분히 빠지지 않은 상태에서 오는 거친 느낌인지 조금 더 확인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번 네 가지 원두 가운데에서는 가장 가능성이 보였던 배치였습니다.
4.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코케 허니
마지막은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코케 허니입니다.
이 원두는 결과를 마시기 전부터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로스팅이 정상적으로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원두의 발색만 봐도 전체적으로 부족해 보였습니다.
실제로 로스팅 도중 팝핑이 진행되는 시점에 불이 꺼지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침착하게 조금 더 기다렸어야 하는데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고 배출했습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불이 꺼졌더라도 장비 안에 남아 있는 열을 이용해 최소 1분 정도는 더 발현을 가져갔으면 결과가 조금 나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실제 결과가 좋아졌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 배치는 정상적인 로스팅 프로파일이라고 보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예상대로 올라온 곡물향과 언더 뉘앙스
브루잉 결과도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언더 뉘앙스가 많았고, 곡물 같은 향이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약배전에서 제가 피하고 싶었던 맛이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문제는 이 결과를 다음 로스팅 데이터로 활용하기도 어렵다는 점입니다.
로스팅 후반부에 불이 꺼졌고 대응 역시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상적인 조건에서 얻은 결과와 비교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이 배치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였습니다.
다음에는 팝 이후 발현을 확실하게 확보해보자.
고온 투입과 저열량만으로 약배전이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번 테스트에서 제가 사용한 방식은 230도 부근의 고온 예열 후 장비 기준 4단계 열량을 사용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높은 투입 온도로 초반 에너지를 확보하고, 이후 낮은 열량으로 천천히 진행하면 향을 살리면서 약배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여러 원두를 볶아보니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워시드 원두에서는 내부 발현이 부족한 느낌이 강했습니다.
게이샤에서는 산미가 지나치게 튀었고, 콜롬비아 워시드에서는 마시기 어려울 정도의 언더 뉘앙스가 나타났습니다.
반면 에티오피아 내추럴은 상대적으로 결과가 나쁘지 않았습니다.
같은 프로파일을 사용해도 생두 가공 방식과 밀도, 수분 상태 등에 따라 반응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다시 체감했습니다.
이번 약배전 로스팅에서 가장 크게 실패한 부분

제가 이번 로스팅을 돌아보면서 가장 크게 느낀 문제는 낮은 열량을 너무 오래 유지한 것입니다.
약배전이라고 해서 무조건 열을 적게 사용하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원두의 색상을 밝게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서 충분한 발현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번에는 약배전을 만들겠다는 생각 때문에 후반 발현을 지나치게 조심스럽게 가져간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색상은 어느 정도 원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컵에서는 단맛이 부족하고 산미만 튀거나, 덜 익은 곡물향이 올라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약배전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지점이 바로 이런 부분이라고 봅니다.
밝은 배전도와 발현 부족은 전혀 다른 결과입니다.
다음에는 팝 이후를 조금 더 길게 가져가려고 합니다
다음 로스팅에서는 같은 4단계 열량을 사용하더라도 1차 크랙 이후를 조금 더 길게 가져갈 생각입니다.
현재 생각하고 있는 방향은 팝이 시작된 뒤 바로 배출 시점을 잡는 것이 아니라 2차 크랙에 진입하기 전까지 원두 상태를 확인하면서 발현을 충분히 확보하는 방식입니다.
무조건 시간만 늘리는 것은 아닙니다.
팝의 진행 상태, 향 변화, 원두 색상 그리고 장비의 열 상태를 같이 보면서 배출 시점을 찾을 생각입니다.
첫 번째 목표는 배전도를 크게 높이지 않으면서 언더 로스팅 뉘앙스를 줄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단맛입니다.
이번 결과에서 공통적으로 부족했던 부분이 바로 산미를 받쳐주는 단맛과 질감이었습니다.
약배전 로스팅을 해보면서 느낀 실전 기준
직접 여러 배치를 볶아보면서 약배전에서 특히 확인해야 할 부분이 몇 가지 보였습니다.
첫 번째는 1차 크랙이 왔다는 사실만으로 발현이 끝났다고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색상입니다.
하지만 색상 역시 절대적인 기준으로 사용하기 어렵습니다. 겉은 밝고 보기 좋아도 내부 발현이 부족하면 컵에서는 바로 언더 뉘앙스가 나타납니다.
세 번째는 실제 커핑 또는 브루잉입니다.
결국 로스팅의 결과는 마셔봐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한 번에 너무 많은 변수를 바꾸지 않는 것입니다.
예열 온도, 열량, 배치량, 배출 시점을 한꺼번에 변경하면 어떤 변화가 맛에 영향을 줬는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이번에는 원두 종류와 투입량까지 달랐기 때문에 다음에는 조금 더 조건을 고정해서 비교해보려고 합니다.
약배전은 실패한 배치에서도 배울 것이 많았습니다
이번 고온 예열·저온 발현 방식은 제가 기대했던 결과를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파나마 게이샤는 산미와 언더 뉘앙스가 강했고, 콜롬비아 워시드는 마시기 어려울 정도로 발현이 부족했습니다.
예가체프 코케 허니 역시 후반 로스팅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않아 곡물향과 언더 뉘앙스가 강했습니다.
그래도 에티오피아 시다마 내추럴에서는 가능성을 확인했습니다.
완전히 성공한 로스팅은 아니지만 조금만 더 발현을 조정하면 제가 원하는 방향에 접근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결국 이번 실험에서 얻은 답은 하나입니다.
약배전은 덜 볶는 것이 아니라, 밝은 배전도 안에서 충분히 익히는 과정에 더 가깝다는 것입니다.
다음 로스팅에서는 4단계 열량이라는 조건은 유지하되 팝 이후 발현 시간을 조금 더 확보하고, 2차 크랙 이전 구간에서 배출 시점을 다시 찾아볼 생각입니다.
색상만 보고 만족하지 않고 실제 컵에서 언더 뉘앙스가 사라지고 산미를 받쳐주는 단맛이 생기는 지점을 찾는 것.
지금 제 장비에서 약배전을 만드는 다음 숙제는 바로 그 지점입니다.